부모 없는 아이
Mental Management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항상 정진하지 않겠다면 부모가 되지 말라.




단순히 적령기가 되었기에 적당히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는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가정을 꾸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치 인생의 기본 명제처럼,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물론 이것은 종족의 번영을 위한 본능이기에 생물학적으로는 온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단순히 구성원을 채워 겉으로 보기에 한 가정이라고 보이기만 하면 그것이 진정한 가정인가? 나는 이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다. 가정이 갖춰야 할 여러 요소가 평균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면 가정은 꾸리지 않는 것이 낫다.

자신의 책임감에 대한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빨리 파악하여 자식 세대에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부모 없는 아이

부모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런 인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처음이자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모이다. 유전적으로 특성을 물려받기도 하지만 자아와 인격을 형성하는 후천적으로 교육도 물려받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습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육이란 것은 올바른 사람이 위한 생활환경 속에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 가정환경을 조성하는 것의 가장 큰 주체는 부모이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사랑을 할 줄 안다’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대전제라면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는 학대할 줄 알게 되는 것 또한 참이 된다. 공기가 있어 숨을 쉬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곤 한다. 그만큼 일상이 된 어떤 주제는 정신과 몸에 배어 당연한 것이 된다.

사랑이 깃들어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자신이 하는 행동이 사랑을 하고, 받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반대로 고통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이 당한 고통이 기준점이 되어 남에게 최소한 당한 만큼의 고통을 주게 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지 자체를 할 수 없다.

 

이 정도의 간단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흐리멍덩한 자아를 가진 자라면 가정을 이루지 않는 것이 옳다. 자기 유전자를 가진 어린 존재 앞에서 작은 욕구마저 제어하지 못하고 멋대로 가정을 풍비박산 내는 자들이 아이들이 자라나야 할 흙을 다 뒤집어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훌륭한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복권 몇 장 사서 1등 당첨을 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대게 저런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99%임에도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도 성공한 위인들의 삶에 비교하며 그 탓을 100% 자식에게 돌린다. 그렇다면 너그럽게 질문을 해보겠다. 극소수의 훌륭한 가정을 못 만들지언정 평균적인 대다수의 부모가 만드는 환경조차 당신들은 왜 만들지 않았는가? 매스컴에 나오는 수백만분의 1 확률의 복권 1등 당첨자가 자신이 될 거라는 헛된 희망을 좇는 꼴과 다를 바 없다. 전혀 노력 없이 훌륭한 과실만을 바라는 도둑심보이다.

 

대를 잇는 불행

 

사람은 가정에 대한 이해를 홀로 정립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은 절대 짧지 않아 이해한 순간 결혼 적령기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그 전 세대, 즉 부모에게서 약 50% 정도를 인계받아야 한다.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나 목적 따위 들이다.

그 이유와 목적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 ‘화목하고 안정적인 안식처’ 정도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인계 방법은 구두나 문서가 아니고 부모가 만들어 자식이 함께 참여해 몸으로 느낀 가정환경이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면 당연히 가정은 불행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면 가정은 행복이라고 생각할 것은 두말할 여지 없다. 이것이 –50%와 50%의 차이다.

물론 스스로 불우함을 극복했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어디든지 예외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비율은 높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구성원을 갖춘 가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여러 갈등 요소를 해소하지 못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꼭 화산이 터져야 위험한가? 화산이 언제 터질지 몰라 위태한 환경이 지속되어 불안에 떠는 것도 화산이 터지는 위력과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근접하려 노력한다면 뒤늦게라도 불우한 환경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유년기에 완성된 불구의 모습을 꾸준한 노력으로 가릴 수 있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척,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척하는 본질을 감추는 행동은 상당히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인지하는 이 시점이 앞서 말한 적령기를 지난 후라는 것이다. 물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뇌를 비운 채로 남이 시키는 대로 마리오네트처럼 살아간다면 자신의 의지로 가정은 이루겠지만 또 전 세대의 반복이 계속될 것이다.

 




부모 같지 않다면 과감히 떠나야 한다.

 

이러한 잘못을 끊어낼 수는 없고 문제 있는 가정은 계속해서 불행한 대물림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한 혹은 못했던 자들과 연을 빨리 끊어내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간혹 이것을 반윤리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종족 번식의 본능에 따라보면 오히려 윤리적이다. 불량한 세대를 만들어내거나 대가 끊기는 상황에 일조하는 부모와 연을 지속하는 것이 반윤리적일 테지.

 

대개 불량한 가정을 꾸린자들 중에 앞서 말한 적령기가 지난 나이가 되어 잘못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뼈를 깎는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고통에 익숙하지 않다.

자신의 작은 욕구도 제어하지 못해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자식들에게 고통을 준 사실을 인정하는 척할뿐 만회할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는다. ‘못한다’는 것이 더 옳겠다.

 

사람은 고통으로 단련되어 농익어간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작은 고통도 참지 못했던 사람이 과연 뼈를 깎을 만큼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까?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법인데 갑자기 바뀔 수 있을까?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를 할 뿐이다. 내가 진정 고통스러워 봐야 상대가 느낄 고통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기에 깊은 고통을 피했던 자들은 감히 상대의 고통의 근사치도 알지 못한다.

 

단순히 내가 외로워서, 남이 하라고 해서 어설프게 가정을 꾸리지는 말라. 늦어도 좋으니 그 필요성을 깊이 깨닫고, 또 운영할 수 있는 그릇에 도달하기 위한 지혜가 다 들어찼을 그때를 택해 그 누구하나 걱정이나 불행한 구성원이 없는 안식처를 만들기 바란다.

본성이 선하지 못하여 그런 척이라도 해야한다면 완벽히 해낼 수 있도록 뼈를 깎아낼 노력이 익숙해졌을 때 그때가 적기이다. 단순히 모든 것을 퍼주고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지식의 축적과 값진 여러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로 그릇을 키워 채워넣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자아를 완성시켜 홀로서기가 되면 그 어떤 분란도 잠재울 수 있는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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