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려에 대한 노력
혼자 있을 때만큼은 조용한 곳에 있고 싶어하는 성향으로 시간나면 도서관을 종종 찾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글을 쓰거나 할 경우에는 노트북을 들고 갈 때도 있다. 열람실은 사용자가 시끄럽지 않도록 서로에게 조심하는 분위기가 기본이기에 발소리, 문소리에도 예민한 곳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노트북을 들고 갈 때를 대비해 클릭이나 스크롤을 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 무소음 마우스를 일부러 구입했다. 혹여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때리는 소리도 크게 들릴까 키스킨도 씌워 마찰음과 충격도 줄였다. 너무 유난 떠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거슬리는 만큼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는 그 어떠한 소리가 그 누군가에게는 큰 소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배려의 시작이다.
딱히 약속이 없는 주말엔 집에 있는 것보다 밀린 독서와 생각정리를 위해 도서관을 향한다. 결국 오늘도 신경거슬리게 만드는 PC이용자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귀가했다. 원래 노트북의 키보드는 구조상 소음이 크지 않은데 그저 자기 편하자고 딸깍딸깍 거리는 키보드를 들고와서 온종일 딸깍 거리고 노트북의 터치패드는 내 팽겨 둔채로 클릭소리와 드르륵 스크롤 소리로 시장판 약장수 마냥 리듬을 타고 있다. 눈치를 여러번 줘도 이런 부류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혈기왕성할 때 였으면 얼굴을 붉히건 말건 말을 내뱉고 언쟁을 벌이던 했을텐데 그런 경험으로 체득한 것은 스스로의 에너지, 감정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저 빨리 피해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상책이다.
커뮤티니에 떠도는 검증되지 않은 어떤 유저의 말이었지만 일정 정도 공감했던 말이 “도덕성은 지능에 비례한다.”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까지만 미치는 지능이면 남의 사정은 알래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능의 높고 낮음은 사람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그 사람의 환경적 형성요인을 무시한다면 일견 타당해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사람을 형성하는 데에는 환경요인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예의범절을 중요시 하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생각이 짧더라도 환경에 의해 몸에 배어온 배려가 습관처럼 나온다. 또한 지능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개발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고자 하고, 더 알려고 하는 의지도 스스로를 도전해야하는 환경에 내던지는 것이므로 이것 또한 환경적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의범절을 중요시 하는 가정이라면 의례 엄격함이 예상되고, 자기개발을 위해 험난함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행위들 또한 고단함을 예상하게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편하지 않고 안락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통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격언 또한 그 얻는 것이 개인의 부와 관련된 것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속세에 찌든 단편적인 생각이다. 우리의 굳어진 잘못된 생각과 몸가짐 또한 바꾸고 얻어내려면 큰 고통이 따라온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기위한 고통은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의 수련을 위한 고통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끔 큰 돈을 번 어떤 회장 나리들은 짐승만도 못한 언행과 행동들을 하곤 하는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가 되기에는 큰 부를 얻기위해 받은 고통이 너무 컸을까? 만일 그렇다 해도 인성을 닦는 고통을 외면한 댓가는 언젠가 치르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채집을 하고 사냥을 하던 시기에도 개인의 능력은 중요했다. 생사를 결정 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에 사냥을 하지 못하면 굶어죽었던 것처럼 물질주의에 절어든 이 사회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죽은 듯 살아야 한다. 지난 수백년 간을 돌아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현재의 사회발전 속도를 대부분은 따라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속도를 맞춰 따라갈 수 있는 극소수들이 부를 독점한다.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단언컨데 그럴 수 없다. 다만 자신은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수들이 도덕성과 인간성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물위를 걷는 도마뱀을 쫓다가 외로이 점점 깊은 물로 빠져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인륜을 버리면서까지 얻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고난 심성이 선하다면 좋을 것이고, 자란 환경 또한 올바르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들이 겹쳐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우리 모두 악함을 갖고 태어났고 사회적 불평등에 노출되어 그것이 자라나 수시로 드러났나 감춰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수련 혹은 생각의 확장으로 통제할 수 있다. 나의 사소한 행동하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가급적이면 평화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이런 노력이 비록 나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타인과 어울리는 동안에는 그것이 자신의 배려와 인성으로 비춰질 수 있다. 내가 불편하면 남은 혹시 불편하지 않을지. 내가 기분이 나쁜 상황에 남이 그 상황에 처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라는 정도의 기본적인 역지사지가 사실상 가장 현실적인 배려이다.
다시 오늘로 돌아와, 열람실이 떠나가라 타자를 치다가 백스페이스를 연타하고 드르륵 스크롤을 굴리던 그 PC남은 개인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소신으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약장수 짓을 했는가는 관심없다. 그가 무슨 대단한 논문이나 사업일을 해서 사회적 성공을 하건 말건 그것도 관심없다. 다만 남들과 함께하는 공간이 자신의 안방인양 구는 그 사람이 과연 자신의 자리에서는 인성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사람이겠냐는 것이다. 알고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진정 악인인 것이고 모르고 했어도 문제다. 앞서 말했듯 자신을 돌아보는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개선될 수 있음에도 그것조차 안하는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