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해봐야 잠시 세상에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질서를 위해 만든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속하여 거꾸로 구속당한다. 남들이 하는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요당하고 좀처럼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스톡홀름 증후군 처럼 인질의 처지를 당연하게, 또 고맙게 생각한다. 마님에게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굽신거리며 고마워하는 그 노예근성.
목적없이 노는 영상이 유튜브에서 상위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인데, 정작 남들 밖에서 노는 것 보고 집구석에서 큭큭 거리며 부러워하는 그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자유를 원하면서 정작 자유를 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피할 수 없는 경제활동의 굴레에 빠져서 소비가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그 소비 때문에 경제활동에 더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있다. 점점 생각의 여유가 없는 삶이 되어가면 악순환의 쳇바퀴는 더 거세게 돌아가고 카드대금을 갚기 위한 기계로 변해있다.
잠시 이 속세를 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한다. 그런 여유를 바탕으로 나 자신에게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 것이 자아를 다시 깨워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귀찮음을 돈벌이가 안된다는 핑계로 가려 모두 의미없는 것이라고 외면한다. 정작 그런 시간을 또 헛되이 유튜브에서 남들이 노는 것을 보며 또 부러워하겠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세상의 구정물에 점점 절어갈 수록 명언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로지 머리속에서 생각만 할 뿐 이래서 또 저래서 안된다는 핑계만 찾아낸다. 그 핑계 찾을 에너지와 시간이면 이미 무언가를 했을텐데. 일단 활이 시위를 떠나면 멈출 수 없듯 어떤 것이든 시작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다. 대신 희생할 것은 과감히 버려야겠지. 사발에 음식이 가득 차면 먹어 없애던 내다 버리던 해야 새 밥을 구걸할 수 있음은 각설이도 알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음식이 썩어 문드러져도 아깝다고 버리질 못한다.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담을 수도 없고 썩은 음식 때문에 스스로 병들어가도 놓지를 못한다.
새로운 것을 담자. 그동안 퍼져있으면서 했던 것들 모두 갖다버리자. 남들 놀고 자빠진 유튜브를 당장 끊고 주말에 정처없이 떠나자. 첫 걸음에 어디를 향해야할지 모른다면 국내 여행 패키지라도 구입하던지 절간에 템플스테이라도 가자.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치열한 출퇴근에 쩌들은 그 루틴을 깰 수 있는 다른 공간으로 잠시 쫓겨가듯 피신을 가도 좋으니 이동해야한다. 그곳에 가면 그렇게 자유를 찾아 간신히 담을 넘어 도망나와 자유인이 되보려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나갔다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뒷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것은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지나가는 바람이 귀를 스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자. 한번 스치고 간 바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 또 다른 바람이 귀를 간지럽혀도 어차피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괘념치 않아도 좋다. 죽을 때 같이 죽어줄 것인가? 어차피 결국 삶은 외로운 것이고 혼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남들에게 답을 구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수 천만 가지의 주관식 답 중에 나에게 주어진 문제의 답은 결국 나만이 알고 있는데 왜 자꾸 남에게 물어보나? 그래봐야 결국 오답일텐데.
그래서 글재주는 없지만 글을 쓴다. 소비적인 삶에서는 느낄 수 없는 뇌의 자극, 숨어있던 감성의 근처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다시 또 오롯이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남들이 아닌 나에게 이 소중한 시간을 쓸 수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이 좋다. 삶은 원래 고난의 연속이다. 돈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모두가 고민에 빠져 산다. 그렇게 고민으로 얼룩진 하루를 그날 혹은 다가오는 주말의 가슴 벅찬 기대로 잊을 수 있다면 견뎌볼 만한 삶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