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후천영재
유치원에 갔다. 사실 이때부터 슬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폭언, 폭행으로 난 이미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잃었다. 성숙했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 최하단에서 짐승과의 경계를 왔다갔다 했다. 사회성은 전혀 없었고, 왠지 선생님이 나를 두들겨 팰 것 같아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조차 못하고 바지에 지릴 정도였다. 선생님이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두들겨 맞을 때 나의 의사를 표현하면 덤벼든다고 밟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소변을 바지에 지리고 나서 집에 가면 빨랫감을 늘렸며 또 두들겨 맞았다.
결국 유치원에서 부터 굉장히 답답한 아이로 열외 취급을 받았다. 선생님들도 한 두마디 건네다가 포기해버리는. 그런데 그래도 상관없었다 때리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 만큼은 집에 있지 않아도 되어 매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은 편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친구도 없었다. 그러다가 반년 즈음 지나 걱정없이 밝고 말을 걸어주던 ‘안태기’라는 이름의 연탄가게집 아들과 친해졌다. 왼손잡이에 하얀 얼굴로 그냥 계속 웃고 마냥 밝았던 아이였는데 언젠가 한번 그 친구네 놀러간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 장난을 거는 모습과 또 그걸 받아주는 모습에 뭔가 혼란스러웠다. 나라면 장난을 걸지도 못했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뭐라도 하나 날아올 것이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면 이런 밝은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 옆에 몇몇 있어서 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진정 순수하고 해맑았다. 난 그런 것을 가질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욕을 먹지 않고 맞지 않을 수 있을까?’ 만 생각해야 했으니 이미 생각 자체는 짐승의 것으로 퇴화된 상태였다.
표본이 많지 않아서 그랬을까? 합리화를 하려 했을까? 그 친구가 특별한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난 그 폭력으로 얼룩진 우물안에서만 살아온 개구리였기에 폭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지 바깥세상을 이해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유치원생이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것일테지. 모친은 나와 동생에게 TV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의 다큐를 보여주며 ‘밥이라도 먹여주는 내가 고마운 줄 알라’며 세뇌를 시켰다. 복날 개 잡듯 애를 패놓고 밥은 안굶겼다는 핑계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셈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어린 나이에 스톡홀롬 신드롬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이런데도 난 밥을 주니까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뜬금없이 칼을 자신의 목에 갖다대고 ‘내가 확 죽어버리겠다. 내가 죽으면 니들 어떻게 되는줄 알지?’ 라며 그 어린 애 둘을 앞에 앉혀놓고 협박을 해댔다. 그러면 우리는 무서워서 울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정신병자였다. 병원에 쳐 집어넣던지 어디다가 묶어 가뒀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부를 통제하고 이끌어야 할 부친은 일개 하급 공무원이 대통령이라도 되는 양 일 핑계로 밖으로 돌았다. 당연히 그와 나의 추억같은 것도 없다. 굳이 하나 꼽자면 명절에 TV프로그램에서 하늘에 연을 날리는 것을 보고 연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 있다. TV처럼 실패에 실을 길게 늘어뜨려 하늘 높이 날리고 싶었다. 다음에 만들어준다며 미루는 것을 졸랐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 깃도 없는 방패연을 투덜대며 만들어 2m나 될까싶은 길이의 실을 대강 엮어서 이걸로 계속 뛰어다니라며 던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이것이 유일하다.
난 강변에 함께 가서 저 높이 연을 날려주면 그때 실패를 넘겨 받아 날리고 싶었던 것인데..
다른 친구들이 아빠들과 하는 것처럼.
어느덧 유치원 졸업식이 되고 그 자리에 부모님이 와야한다는 말을 전했고
‘내가 거길 왜가냐?’
결국 유치원 졸업 때 나만 부모가 오지 않은 놈이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들의 폭력이 만연했던 시기라 마음에 안들면 매가 날아오던 때였다. 손바닥, 발바닥 등을 때리거나 정신 나간 선생들은 머리를 내려치고 뺨을 후려갈기기도 했다. 허나 이보다 최소 몇 배는 더 심하게 맞아왔기에 오히려 학교가 더 편했다. 최소한 내가 잘못하지 않으면 안맞을 수 있으니 그저 존재만으로 매를 맞아야하는 집보다 합리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어찌보면 기회이자 위기였다. 정기적으로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정당함이 있지만 ‘공부’ 라는 것이 트집 잡히기 너무 좋은 먹이였기에 대책이 필요했다. 1학년 때 뭘 알겠나 공부 어쩌고 해봐야 그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처참한 성적표로 또 매질을 당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공부를 했다.
이후 3학년 때 까지 항상 전 과목 다 맞거나 오답 5개 이내를 유지했다.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천재 아니냐 이런 소리들을 했다. 그 사람들은 이것이 나의 생존과 관계된 문제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 성적을 받아서 들어가면 옆집 아주머니들이 ‘공부 잘하네~’ 소리 몇 번 해주면 매질을 피할 수 있었다.
1~2학년은 학급 임원은 없이 담임선생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3학년 때부터 학급 임원을 선출했다. 반장 후보는 성적 순으로 올려놓고 인기투표를 해서 뽑는 식이었다. 3학년 1학기 때 반장이 되었다. 그때는 그냥 시험 잘보면 인기가 많던 분위기였다. 그래서 성적 순으로 당시 1등이었기에 당연히 후보에 올랐고 인기 투표도 그 순에 따라서 선출되었다. 그런데 기쁘기도 하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때 나는 집이고 학교에서고 입을 열지 않던 시기여서 과연 반장을 내가 할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도 뭔가 완장차니까 기분이 좋았다. 하교하고 자랑스럽게 모친에게 말했더니
‘그런 걸 또 왜 해서 돈도 없는데 돈들게 만드냐’
타박이 시작됐다. 솔직히 이건 매질을 당할 사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질은 피했으나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반장을 했는데 그런 반응일 줄은 상상을 못했고 허무함 때문에 포기라는 것을 배웠다.
의도치 않게 반장이 되어 담임과 학부모의 면담이 정기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는데 촌지가 만연하던 시기라 모친은 또 돈 갖다줘야 한다며 온갖 욕설과 짜증을 부려댔다. 그러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을 안하자 담임은 펜글씨를 잘 못 쓴다며 발바닥을 때리고 남아서 펜글씨 교본을 쓰게 한 뒤 부모님을 모셔오라 했다. 3학년이 글씨를 삐뚤빼뚤하게 쓰는 것이 그렇게 얻어맞을 짓은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촌지를 원한 담임의 뻔한 수작질이었다. 그래서 학부모 면담이 있던 그날은 펜글씨를 왜 못써서 촌지를 갖다주게 만드냐는 이유로 또 초죽음이 될 때까지 얻어터졌다.
시험은 잘 봐서 매질의 고비는 넘겼지만 생각지 못하게 펜글씨를 잘 못쓴다는 이유로 또 두들겨 맞고 나니 이 구멍마저 메워야 더 안 맞겠다 싶어서 그 때부터 펜글씨를 죽을 듯이 연습했다. 그래서 지금의 필체는 이 때 다 만들어졌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이미 소위 말하는 ‘어른 글씨’체와 유사한 느낌이 나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같은 반 동급생의 성적표에 부모 확인 글을 많이 대필 해주었다. 맞춤법에 대한 강박도 이때 생기기 시작했다. 받아쓰기 좀 틀리는 것이 큰 죄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가혹한 매질로 이어지기 때문에 잘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건 그렇고 학급 임원은 잘 해냈을까? 뭐 말도 못하고 담임 얼굴도 못쳐다보고 피해다니는데 반이 제대로 굴러갔을리가 있겠는가? 부반장 친구가 거의 반장 일까지 떠맡아서 어찌저찌 굴러는 가고 3학년 2학기가 되었다.
학기마다 임원 선출하는 바람에 성적 순으로 다시 난 또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여기서 좀 웃긴 일이 발생했는데 내가 반장이 되자 담임이 당황하며 반장이 너무 수줍음이 많아서 반장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재투표를 하자고 제안했고 그 꼬마들이 뭘 알겠나 그러자고 해서 2차 투표를 했는데 또 내가 되어 다시 투표를 했고 결국 3번째 투표 끝에 난 2위로 부반장이 되었다. 이 날도 정확히 기억한다.
걱정을 안고 집에 돌아갔다. 부반장도 학급 임원이기에 또 돈 얘기 들먹거리며 모친에게 저주를 뒤집어 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쭈뼛거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웬일로 부친이 집에 있는 것이었다. 화단에 모종을 심고 있었다. 내심 그래도 이걸로 둘이 대판 싸움이 일어날지언정 나에게는 불꽃이 튀지 않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부친에게 먼저 말해서 방어선을 만들고 모친에게 말해서 피해를 줄여보고자 했다. 부친에게 작은 소리로 부반장 했다고 하자. 화단 벽쪽을 향해 앉은채로 얼굴도 돌아보지도 않고
‘반장도 아닌데 부반장이 뭘 자랑이라고 말하냐?’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왜 아직도 기억하냐면 지켜줄거라 굳게 의지하던 방어선이 갑자기 사라져 직접 그 욕설과 비난을 맞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려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에 사진을 찍은 듯 그 현장이 생생하다. 그만큼 가혹한 매질은 너무 큰 공포였다. 그나마 부반장 자리라도 차지해서 그랬는지 폭행은 피했지만 역시나 모친은 혀를 끌끌차며 폭언 섞은 모진 말들을 쏟아냈다.
결국 성적 순으로 임원을 뽑는 이 제도 하에서는
임원에 뽑힐 정도로 성적을 유지하고 매질을 피하는 대신 노력을 하고도 욕설과 비난을 들어야 하는 허탈함을 감수해야했고, 아니면 임원에 뽑히지 않을 만큼 성적을 떨어뜨려 매질을 당하는 대신 노력에 대한 보상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이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허탈감이 더 커서였는지 몰라도 난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사람취급 못받는데 굳이 노력이라도 안 해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고작 10살짜리가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살고자 하는 본능과 관련된 말일지도.
어쩌다 학교에서 동급생과 가벼운 주먹 다툼이 있었는데 화해를 시킨다는 담임의 중재안으로 학교 근처에서 그 아이와 엄마, 나와 모친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나이에 치받고 싸우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4명이 얘기하며 풀어보자는 그 길 한복판에서, 모친은 다짜고짜 나의 뒷통수를 갈기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와 다투었던 그 아이가 눈앞에 있고 하교하는 학생들이 다 쳐다보는 자리에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계속 뺨과 머리를 맞았다. 상대 어머니가 말려서 잠시 그쳤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넌 집에 가면 뒤졌다, 오늘이 니 제삿날이다’ 등등 협박을 해댔고 결국 빗자루 몇개 부러지고 발로 차이고 밟히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친은 방구석 맹수였다. 집에서는 나같은 초식동물, 그 중에도 새끼는 그야 말로 밥이지만, 밖에 나가면 자격지심인지 뭔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의견을 펴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일방적으로 속고 당하는 사람이었다. 자아가 없어 남들이 하는대로 그대로 했다. 거기서는 또 따돌림 당하기 싫었는 모양이다.
학급 임원 부모들은 대체로 자식에게 도움될 만한 것들은 빚을 내서라도 해주는 교육에 진심이다. 그러니 아이가 학급 임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모친은 밖에서는 자기 의견을 내지 못하는 극 초식동물이 되어 그들이 자기 자식들 시키니 같이 시키자고 꼬드기니 그 분위기에 휩쓸려 따라 시켰다.
보이스카우트를 가입 당했지만 난 이미 그때 모진 매질과 학대로 사회성이 0에 가까워 사람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피하기 급급해서 모임에 단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난 정신병 치료를 받았어야지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인데 비싼 돈 들여서 시켜줘도 안한다고 며칠 내내 돈, 돈 거리며 욕을 먹었다. 향후 매질의 레퍼토리로 추가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당시는 요즘 과는 다르게 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이라 의지를 가지면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시기였다. 뜻하지 않게 목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때가 4학년이었다. 전학으로 부반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어 욕을 더 안 먹어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또한 아파트로 이사가면 맞다가 쓰러져도 피부가 쓸리고 까져 피를 반드시 보게 되는 맨바닥 마당이 아니라 다행이다 싶은 정도의 작은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전학이란 실로 큰 고통이었다. 난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를 만드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특히 전학으로 새로운 인사를 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어딘가에 적응을 하기 위한 1순위는 동료를 만드는 것인데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을 피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등교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목동은 학구열이 세기로 유명한데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신도시로 개발된 지역과 재개발 예정 지역이 맞닿는 곳에 위치해서 학생들의 질이 티가 나게 갈렸다. 신도시의 아이들은 깨끗하고 바른 모습이었지만 재개발 지역 절반의 아이들은 보기에도 더럽고 입에는 상욕을 달고 다녔는데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자아가 형성 되었을리는 만무하고 부모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일테다. 물론 나는 말을 안했을 뿐 어쩌다 신도시에 살지만 속은 더럽고 거친 쪽이었다.
그때 즈음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당한 매질이 억울해서일까 어줍잖은 장난을 걸거나 시비를 걸어오던 아이들(대부분 재개발 지역쪽이었다.)과의 다툼이 잦아졌다. 애미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주먹부터 날리는 것이었으니 나또한 그 못난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날이 멀다하고 싸워댔다. 체급이 낮았던 탓에 결국 두들겨 맞는 것은 내 쪽이었지만 그래도 수틀리면 바로 주먹부터 날렸다. 어차피 대화가 없던 집구석이라 등교만 하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집에서 알게 되어봤자 나에게 득 될 것은 없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이때는 이미 공부는 손을 놓고 ‘때리면 맞고 말자’는 정도로 내성이 생긴 상황이었는데 당시 유행이었던 컴퓨터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돈도 없는데 학원씩이나 보내준다’ 등의 공치사가 더 해진 것은 두말할 것이 당연했고, 황당한 것은 내가 보내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이것도 동네 학부모들이 모친 등 떠밀어서 가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학교가 끝나고 집에 더 안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 학원이 좋았다. 그래서 학원 문 닫을 때까지 구석에서 계속 앉아서 배운 것을 반복했다. 학원 다닌지 1달만에 초등생 문제를 모두 다 풀어버려서 중학생 형들 반으로 월반을 했다. 학원 선생이 부모 소환을 했다.
그날 거의 난생 처음으로 가족 회의라는 것을 했다. 학원 선생 왈 이런 월반생은 학원에 여태 없었다며 집에서 가능하다면 PC를 마련해줘서 미래에 투자해 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하니 부친이 어인 일로 ‘그럼 컴퓨터를 한 대 다음 달 내로 사줄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했다. 입은 닫고 조용히 있었지만 정말 가슴뛰는 일이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이때는 PC가격이 굉장히 비쌌던 초창기라 이 정도 금전적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것은 이제 나를 인정해주는 건가 하는 그 기대감 때문에 더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약속 했던 그 한 달이 지났다. 역시나 거짓이었다. 부친은 오히려 화를 냈다.
‘돈도 없는데 그 비싼걸 어떻게 사주냐? 뱁새가 황새 따라갈라다가 가랑이 찢어져!’
역시 쏘시오패스 답다. 내가 조른 적도 없고 스스로 사주겠다고 먼저 말해놓고 지키지 못한 자신은 빼놓고 화를 왜 나에게 내는지? 이렇게 또 하나를 포기하게 되었다. 난 이 사람들과 살면서 배운 것이라고는 포기하는 습관이다. 지키지도 못할 거짓말들과 비겁함. 학원도 그만뒀다.
이 당시 내가 재능으로 비춰질 몇가지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하늘에서 재능을 타고 났다는 천재라서가 아니다. 두 부모의 상태를, 지능 수준을 보면 뻔히 답이 나온다. 이것은 살기위해 한 것이다. 심지어 난 아이큐가 좋지도 않다. 실제 난 지능 검사 결과에서도 평균보다 못한 수치를 받았다. 만일 그 지능 검사가 높게 나왔다면 학교에서 부모님 면담을 또 진행했겠지.
나는 이것을 ‘생존본능’이라고 본다. 극한의 폭력에 내몰리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발동한다. 어떤 것이던지 잘하면 욕을 들어먹고 끝나지만, 못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제삿날이 펼쳐진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모친은 항상 그 얘기를 했다.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다’ 그러고 눈깔을 뒤집고 두들겨 팼지. 아픔도 아픔이지만 조금씩 성장하면서 내가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자괴감이 심했다.
남들이 부모에게 어리광 부리고 사랑받을 때 난 맹수를 피해 동굴을 찾아 헤매이고 사냥을 하던 살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늑대소년 처럼 살았다. 살기 위해 했던 습관들이 뇌 뿐만 아니라 온몸에 녹아든 것이다.
이것이 아니고 정말 천재였다면?
그럼 난 이 집 자손이 아닌 것이 되겠지.


